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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에걸터앉은글

촛불 앞에서 - 고은


 

                           촛불 앞에서 

                                                     고은 


우리는 오늘 뭔가를 놓쳐버리고 있지 않은가 

꼭 찾아야 할 것을 

엉겁결에 열차는 떠나버리고 

꼭 이루어야 할 것을 

저 하늘 높이 휘날릴 깃발 

결코 헛될 수 없게 

꼭 이루어 

내일의 푸른 들녘 가득히 피어날 꽃을 앞두고 

우리는 오늘 뭔가를 몽땅 놓쳐버리고있지 않은가 


밤마다 여기저기 모여 

자꾸 주사위만 던지면서 

꼭 만나야 할 것을 

그냥 보내고 말지 않았던가 

차가운 밤거리 지나가던 

지난날 통금시대 안마장이 소경의 피리소리 

그것마저 보내고 난 숨막히는 정적 

우리는 한때 거기에 활을 쏜 적이 있다 


그러나 너무나 오래 외치던 소리들도 사라지고 

바람만 떼굴떼굴 구을러와 

뼈라조각 비닐조각 신문지조각 

이것이 자유였던가 

우리는 오늘 뭔가를 놓쳐버리고 있지 않은가 


역사라는 말 또는 역사의 마지막이라는 말 

그렇게도 많이 썼건만 

언제나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할 일을 다했던가 

뼈아픈 먼 산맥들이여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황야 그것을 위해 싸웠던 세월 

그것들을 위해 더이상 무엇이었던가 


한 자루 촛불 앞에서 

우리는 결코 희한에 잠기지도 않거니와 

우리는 결코 기원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는 오늘과 오늘 이전 

그 누누한 시간 뭔가를 놓쳐버리고 있지 않은가 

촛농이 흘러내리자 

한층 더 밝아진 촛불 앞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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