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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낡은서랍속바다

조로는 자신의 원 밖에서 적과 싸우지 않는다

‘마스크 오브 조로’를 보면 주인공 안토니오반데라스가 원조 조로 안소니 홉킨스에게 무예를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무턱대고 덤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검이 닿는 가상원을 스스로 설정하고, 적을 끊임없이 그 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조로는 자신의 원 밖에서 적과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출처: 캡쳐했음

참으로 신기하게도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자기가 중심이 되어 일이 추진될 때는(자신이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그닥 힘들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변태(?) 마냥 힘든 감정을 즐기기도 한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 자신이 상황과 조건에 끌려다닐 때는 조금만 힘들어도 금새 녹초가 되어버린다. 하기 싫다는 생각만 머릿 속에 가득찬다.

무엇을 하든 마찬가지이다. 공부도 마찬가지이다. 변태마냥 고통을 즐길 수 있는 자기주도적인 상태가 필요하다. 그런 상태는 개인의 성향, 장단점에 따라 상이할 것이다.

7주 중 1주 교육과정을 오늘 끝마쳤다. 끌려다닌 느낌이다. 일반적인 견해처럼 나 역시 어학연수는 외국인이나 만나고 여행이나 즐기다 오는 ‘대학생들의 헛돈쓰기 대회’로 알고 있었다. 물론 전부다 그런 것도 아니고, 전부다 아닌 것도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건 지금 내가 있는 MSU의 어학연수 프로그램 뿐이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나의 의지를 꺾을 만큼 공부의 양이 상상을 초월한다. 매일같이 숙제가 쏟아진다. 단지 회화를 배우고 단어를 외우는 영어가 아니라, 글을 어떻게 분석하며 읽을 것인지, 영어에 적합한 논리적인 글을 쓰기 위해 소재의 범위를 어떻게 줄여나갈 것인지를 토론하고 실습한다. 회화수업 역시 학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근처 대형마트를 탐방해 해당 마트의 상품과 운영과정에 대해 조사하는 숙제 등이 주어진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나의 장점이자 단점은 ‘내가 주도적이지 않으면 쉽게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단지 운영에서의 주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해당 내용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공부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주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말도 더듬거리는 외국인인 내가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이전까지 민망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행동을 지난 4일동안 풀어놓는 느낌이다. (더듬거리는 말로 자꾸 외국인에게 말을 거는 것도 이전까지의 나는 절대 하지 못했던 행동 중의 하나이다)

미국 대학생들이 숙제에 파묻혀 지낸다는 이야기를 이제 실감하고 있다. 앞으로 갈수록 과제가 더욱 많아질 것이라는 불안이 눈앞에서 조금씩 현실화되고 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6년 중에 4일을 헤쳐왔다.

6년의 기나긴 항해를 위해 튼튼하게 돛대를 세워야한다. 한없이 돛대만 세우다 정작 배는 띄우지 못하는 자기만족의 모습도 경계해야 한다. 무엇이든 적당히 해야 한다. 요즘 내 인생의 두 글자, 무엇이든 ‘작작’ 해야 한다.